정보화마을 충남 청양 구기자/고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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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 구기자/고추마을 전경사진입니다.

우리마을과 구기자

구기자사진

오늘날 구기자 특산지로 된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면에서 제일 먼저 구기자를 재배하여 생업과 산업에 도움이 되도록 한 사람은 그 당시 공주군 신풍면 토끼울에 살던 박관용씨의 집념과 의지의 결과라고 전해진다.

박관용씨는 1908년에 출생하여 7살때부터 공주군 신풍면 토끼울에서 살게 되었다. 1922년경 15세 때 자택 울타리에 하얀색 나무 줄기에서 빨간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이름이 구기자인데 약으로 쓰이는 것으로서 그 열매를 말려 놓으면 상인들이 사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당시 가격이 근당(600g) 70~80전에서 1원이 넘는다고 하였다. 당시 땅 한평에 10~20전 할 때인데 구기자를 잘만 재배하면 농촌이 부유하게 되는 길이 여기에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구기자는 야생으로 담장 밖이나 밭두둑 귀퉁이에 몇 그루씩 자라는 정도에 불과했고 특별히 농작물로 재배하는 농가가 전혀 없었다. 농촌에서는 이 야생 구기자를 열매가 익으면 겨우 한두 근 정도 따서 말려 모았다가 팔아 가용에 보태 쓰곤 했다. 이때부터 박관용씨는 구기자 재배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구기자 묘목을 채취하여 시험재배를 시작하였는데 여러곳에서 채취한 종자 중 집 근처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우수품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선생은 본격적으로 종자를 개량하는 한편 어떠한 거름을 주면 잘 크고 거름을 주는 시기는 언제가 좋은가를 연구하고 구기자를 말려서 상품화하는 법을 창안하는 등 구기자를 이 고장의 토양과 기후에 맞게 기르는 법을 연구해 나갔다. 이때가 선생이 “구기자에 미친 젊은이”라는 별명을 듣던 때이다.

박관용씨는 몇번의 시험재배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당시 농촌에는 상당수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되어 “구기자를 심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위에 보여주었다.
이 때 박관용씨는 나이 19세 되던 때라 한다. 나이가 어려 재산에 대한 권한이 없어 농토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는 형편에 있었으며 겨우 밭 300평에다 구기자를 심었는데 말린 구기자 700근으르 수확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시가로 근당 1원 70전으로 총액 1,190원의 소득이었다. 그때 농지의 가격은 밭 한평에 10~20전이면 구입할 수 있었는데, 그 돈이면 밭 5,000여평을 사고도 남는 수확을 거든 것이다. 그 다음해는 780평을 심었는데 구기자 4,030근을 수확하게 되었으니 평당 5근 수확한 셈이다.
이 때부터 청양군 목면 신흥리 임장골 마을에 “박관용 생약 시험장” 이라는 명칭으로 구기자 농장을 본격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6,000평까지 확장하였다. 한편 구기자가 비싼 값에 팔려서 서울로 올라가고 또한 이것이 중국으로 수출된다는 것에 착안하여 당시 서울에 있는 중국 영사관에 문의한 결과 중국에서도 구기자가 생산되지만 품질과 약효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월등하게 좋기 때문에 근당 1원 내외에 사들인 구기자가 무려 4~5원씩에 수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기자 재배 초기에는 주위에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알리지는 아니하였으나 인근 농민들에게 구기자 재배를 권유하여도 너 나 할 것 없이 신통치 않게 생각하여 재배를 아니하였다. 심지어 밭을 거져 빌려 주면서 심으라고 권유해도 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험재배가 성공하고 큰 소득이 있게 되자, “구기자를 심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박관용씨가 구기자를 시작한지 7~8년 후인 1930년 이후부터 한집 두집 구기자를 심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구기자 재배 성공담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각지에서 찾아와 견학하고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